아몬드
다소 충격적인 빠른전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열 일곱살이 되기까지 불과 70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 사이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아꼈던 할멈과 엄마의 실제적 삶이 중지됐다.
여느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상황에 그가 가진 결함은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윤후의 상태를 인지하며 사건의 전개를 읽으니 감정이입의 수고 대신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둘 수 있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해야 할 질문을 놓칠 때가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은 그런 면에서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되려 그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답하지 못할 뿐.
윤후가 경험하는 세상과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의 삶의 온도차가 크다고 느낄 때 ‘바깥은 여름‘속 어느 주인공의 삶이 겹쳐지기도 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 일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중략..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한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245
그는 괴물이 아니다.
알면서 모른척한 우리가 괴물이다.
윤후를 상상하며 ‘비밀의 숲’의 황시목역을 맡은 조승우가 떠올랐다. 드라마 속 황시목이라는 인물이 검사가 되기까지 이와 같은 이유도 있지 않을까 짐작 해본다.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얽혀 생겨난 문제들로 상대의 마음을 고려해 고구마처럼 삼키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윤후를 이해한다면 그를 슬프게도 않고 화나게 하지도 않지만 기쁨을 나눌수 없을 것이다. 감정의 변수를 모른채 살아간다면 본인은 더 살기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또한 윤후를 이해하지 못한 생각인게 분명하다.
보편적 인간상에 비추어 윤후의 다름은 틀림으로 비춰진다. 편협하고 이기적이다.
손끝하나 혹은 입술의 각도에 따른 표현들이 또 다른 언어를 생성하는 암호같은 세상에서 그의 단조로운 표현은 진심의 정수를 맛보게 할지 모른다.
곤이를 만나며 윤후도 곤이도 조금씩 변했다. 둘의 조합은 조증과 우울증 환자가 만나 위로를 받듯 서로 모자란 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곤이로 인해 윤후의 닫혀있던 아몬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감정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하고 투명했다. 여전히 아픔을 표현하지 못하나 그가 곤이를 위해 한 행동은 진심 그 자체였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이들이 다반사인 세상에 정공법을 택한 윤후의 행동이야말로 두려움 없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윤후가 생각한 감정은 이율 배반적인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에게 감정을 설명해 주지만 그럴수록 변화무쌍하고 비겁한 감정의 결과가 그의 아몬드를 더욱 굳게 한 것 같다.
계산하지 않고 본능의 이끌림대로 행동한 그의 마음은 그 어떤 사랑의 표현보다 강력했다.
그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을 통해 아니라고 말했다.
빠른전개와 충격적인 반전에 비해 결말은 다소 밋밋했지만 윤후라는 아이를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모든 소외 당하는 이들이 행복한 세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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