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두께 만큼 내용이 가볍지 않았다. 종교, 신, 여성, 삶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생각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왔으나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조르바라는 인물은 나에게 꽤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조르바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자유롭게 발산하며 사는 자연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제2의 본성을 산투르에 이입하거나 말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춤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그가 가진 삶의 노하우는 삶을 더욱 생기롭게 만들었고 일할 때는 그가 다루는 연장이나 석탄과 하나가 된 듯 가열 차게 일했다.
그는 자연을 대할 때 호기심어린 눈으로 처음 보듯 대하는 아이 같다가 그의 과거 이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세상사를 다 겪은 노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약해 지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화로 인해 쇠약해지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춤을 추며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화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순리적 형상을 뒤엎는 조르바의 발언에 대해 충격을 받으며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긍지에 찬 돈키호테적 반동’이라 했다. 나는 조르바의 생을 향한 의지는 생을 거스르는 의미와도 맞붙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조르바는 화자에게 늘 기다려지고 보고 싶은 대상이다.
조르바는 자신이 누군지 아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 같다가도 도통 인생을 모르는 것 같다며 두목에게 질문한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자신이 이도 저도 아닌 사람 같다며 삶을 자족한다. 생을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부딪히며 자신의 삶으로 통과 시킨 조르바의 상반된 이야기는 모순적이기 보다 “인생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주변에 조르바 같은 인물이 있다면 삶에 대한 추동을 느낄 것 같다. 이미 너무 바쁜 삶이지만 삶이라는 선물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 만 같다.
결정적 순간에 보인 행동으로 그 사람이 내뱉은 말의 진위가 가려질 때가 있다. 성적 대상으로 여성을 주로 언급을 하던 조르바는 과부댁과 오르탕스가 직면한 죽음의 위기 앞에 강력한 보호자로, 깊은 슬픔으로 맞이했다. 그렇다면 마초이며 여성 편력가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은 사회적인 페르소나였을까. 어쨌거나 그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알았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과 태도에 대해 본능적으로 체득한 사람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좁아 보인다는 말은 어떤 어른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조르바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고개를 치켜든다. 오만방자하게 보일 거 같은 그의 삶의 태도가 나는 왜 이토록 매력적으로 보일까. 세월을 따라 체념하는 인간의 모습에 반하는 조르바의 모습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나도 살수록 재미있고 더 많은 것들을 발산할 수 있는 삶의 요소들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렇게 생을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은 전쟁을 필두로 다양한 삶의 이력가운데 인생의 아픔을 느껴보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나도 삶을 두려워 않고 내 나름의 열심으로 맞서는 용기가 생기면 좋겠다. 살면서 조르바 같은 인물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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